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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휘이언적 강계사당기
조회 : 2671 (2013-02-05 21:32:05) 이름 : 박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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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사람
: 박찬승 12.01.15 13:51 주소추가 수신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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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晦齋先生集附錄
 [記]
江界府祠廟記 朴承任 a_024_512b


江界府晦齋先生祠者。爲祀李文元公而作也。府乃先生謫居之地。先生之謫。在嘉靖丁未。謫七年。竟不得出坎。旣沒世而塞垣人心。服之不忘。越若萬曆丙子。煕川學子金生鉉。乃翕一方傾嚮之懇。以廟祠爲請。按使金公繼輝聞之恨晩。肯構斯亟。渠渠棟宇一 024_512c朝翼然。立于鄕庠之左。嗚呼。苟非先生道德之尊。孰得以稱斯擧。而人心之所同然者。亦可驗矣。蓋宗祀先賢。禮莫重焉。風聲氣運。所係不淺。必群心莁合。聽聞恰然而後克擧。故雖其平生棲息之地。出入游宦之方。亦不敢輕議營建。矧伊窮荒絶漠。犬羊之與隣。身罹密網。投竄於層氷飛雪之聚。溘然就木則得其戚嗟沱若斯亦足矣。能知所尊慕追敬而情願設香火之奉。以爲久遠之計。茲豈非有以感之者深而不能自已於興起而然歟。先生挺生東南。稟精純之質。不待師資而超然獨詣。深究而力踐。灼見聖域之正 024_512d路。未嘗一息之或間。以至於體用兼備。推之成物裕如也。應期仁廟之聖。庶幾民蒙至治之澤。而烏號遽墮不一年。先生已作鬼門之羈魂矣。嗟乎。人事世變之靡常。而吾道之不可行有如是夫。西關一路。廟祀先賢者。惟是府與煕煕之祠乃祀金寒暄,趙靜庵兩先生。先生道同心一。私淑而克自追配焉。玆三先生者屹然如泰山喬嶽。鼎立國朝。比者別撰儒先錄。特命印頒。而俎豆聖廟之議。輿情共鬱。抗疏叫天者非一再。下至兒童走卒。亦皆飫於耳熟於口。其道尊德盛。爲如何哉。而生前一身之困踣流離則吁 024_513a亦甚矣。夫疊生鉅賢於百年之內。謂天無意於斯。不可也。天旣生之。隨之以否運。俾不克展其所蘊而蘭摧玉焚之餘。徒崇虛宇於寂寞之濱。其諸謂之何哉。昔伊川程夫子造道已至。而易傳之成。猶待涪州一行之力。先生在邊徼。其所著述者。求仁有錄。進修有規。大學則補章句之遺。中庸則衍九經之義。精力所寓。無非菽粟其味。布帛其文。所以繼往開來者於是焉在。然則先生固海東程氏。而洋洋乎鴨水。實先生之一涪江也。夷狄患難。誠若哲人之蹇厄。而見在所居。自有亨道。反得以助發其事功之懿。微言至訓。下 024_513b詔百世。前賢後賢。若合符節。天意不可知。其或有在於是者非耶。獨伊川生還。而先生纊定客上。古人云。其所不能者人也。此何足爲先生之道之累。而書院聿興於西蠻。新祠繼起於東朔。則其所同然之心。時無古今。地無彼此。果孰使之然哉。先生之孫浚來自東京。適遇金生於都下。聞是祠之構。戚戚然不自禁。生曰。郡廟已記而府獨未。盍圖之使來者有考焉。浚也知余於先生。忝聯瓜葛。踵門相告。仍以記文爲屬。余不覺驚歎而起。邀生而詢其詳。顧余非知先生者。曷敢贊一辭。第於所謂天意之難測。人心之不可誣 024_513c者。竊嘗有所感。玆不以文下爲嫌。而罄其說。金生時典江學。貌樸而質厚。發言諄諄。斯乃西塞之秀。及先生之存。陪杖屨一朞云。其倡立兩祠。爲績孔嘉而已序於郡記。此不悉書焉。

기【記】

강계부(江界府) 회재 선생(晦齋先生) 사당기(祠堂記)

 

강계부(江界府)의 회재 선생(晦齋先生) 사당은 이 문원공(李文元公)을 제사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부(府)는 곧 선생께서 귀양살이하던 곳이다. 선생이 유배된 것은 가정(嘉靖) 정미년(1547, 명종2년)에 있었는데, 7년을 귀양살이 하다가 끝내 적소(謫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났어도 변방의 인심은 가슴에 새기고 잊지 못했는데,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년)에 희천(熙川)의 학자(學子) 김생 현(金生玹)이 마침내 한 지방의 사모하는 간절한 정성을 모아 묘사(廟祠)를 짓기를 청하였다. 안찰사(按察使) 김공 계휘(金公繼輝)가 듣고서 때늦은 것을 한탄하며 건축을 서두르니, 커다란 동우(棟宇)가 하루아침에 날아갈듯 향교의 왼쪽에 세워지게 되었다.

오호(嗚呼)라. 진실로 선생처럼 도덕이 높은 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거사에 어울릴 수 있을 것인가? 인심이 똑같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을 또한 징험할 수 있다. 대개 선현(先賢)을 종사(宗祀)하는 것은 예(禮)가 더할 수 없이 중하고, 풍성(風聲)과 기운(氣運)이 관계된 바가 얕지 않으므로, 반드시 군심(羣心)을 수합하여 익숙하게 들어본 뒤라야 거행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평생 서식(棲息)하던 지역이나 출입하며 벼슬하던 지방이라도 또한 감히 영건(營建)을 가벼이 논의할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저 궁벽한 절역(絶域)에서 견양(犬羊  오랑캐를 뜻함)과 이웃하는 곳임에랴. 몸이 촘촘한 그물[密網]에 걸려들어 얼음이 층층으로 얼고 눈발이 날리는 곳에 유배되어 홀연히 죽게 되었으니, 슬퍼해주고 울어주는 것만 해도 또한 족할 것이다. 그런데 능히 존모(尊慕)하고 추경(追敬)할 줄을 알아서 향화(香火)를 받들 곳을 마련하여 영원하게 전할 계책으로 삼을 것을 진정으로 원하니, 이 어찌 감화시킨 것이 깊어 흥기되는 것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동남(東南) 지역에서 우뚝하게 나시어 정순(精純)한 자질을 품부 받으시니, 스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초연히 홀로 학문으로 나아가 깊이 연구하고 힘써 실천하여 성역(聖域)의 정로(正路)를 분명하게 보고 일찍이 한 순간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체용(體用)을 겸비하게 되고 그것을 미루어 남을 이루어 줌에 여유가 있기에 이르셨다.

천명(天命)에 응하신 인묘(仁廟  인종(仁宗))의 성신(聖神)으로 백성들이 거의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을 뻔했는데, 1년도 안되어 오호(烏號)가 갑자기 떨어지니615), 선생은 이미 귀문(鬼門)을 떠도는 혼이 되었다. 아아. 인사(人事)와 세변(世變)이 일정하지 않아 오도(吾道)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도다.

서관(西關) 일로(一路)에서 사당을 지어 선현(先賢)을 제사지내는 곳은 오직 이 강계부와 희천뿐이니, 희천의 사당은 바로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 조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 양 선생을 제사하는 곳이다. 선생은 도(道)가 같고 마음이 일치하므로, 사숙(私淑)하여 스스로 능히 추배(追配)될 수 있었다. 이 세 선생은 우뚝하게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이 국조(國朝)에 정립(鼎立)하였다. 근래에 별도로 《유선록(儒先錄)》을 찬하여 특별히 인반(印頒)할 것을 명하였는데, 성묘(聖廟)에 배향하자는 논의가 여론과 함께 비등하여 소를 올려 임금께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래로는 아동(兒童)과 주졸(走卒)들까지도 또한 모두 귀에 익숙하고 입에 익숙하니, 그 도의 높음과 덕의 성대함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도 생전(生前)에는 일신(一身)이 곤궁하고 유리(流離)하였으니, 아아, 또한 심하도다.

대개 대현(大賢)이 백년 내에 거듭 났으니, 하늘이 사문(斯文)에 뜻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미 내고서 비운(否運)을 뒤따르게 하여 그 온축된 바를 펼 수 없게 만들고, 난초가 꺾이고 옥(玉)이 타버린 뒤에서야 한갓 적막한 변방에서 빈 사당만을 숭상하게 하니,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옛날 이천(伊川) 정부자(程夫子  정이(程頤))는 도(道)에 조예가 이미 깊었는데, 《역전(易傳)》의 완성은 오히려 부주(涪州)로 한번 유배 가는 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생이 변방에 있으면서, 저술하신 것으로는 구인(求仁)과 관련한 기록이 있었고, 진수(進修)와 관련된 규범이 있었으며, 《대학(大學)》은 장구(章句)의 빠진 부분을 보완하였으며, 《중용(中庸)》은 구경(九經)의 뜻을 부연하였다.616) 정력이 깃든 문장은 숙속(菽粟)과 같은 맛과 포백(布帛)과 같은 문채가617) 아닌 것이 없었으니, 옛 성현을 잇고 후학을 개도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니 선생은 진실로 해동(海東)의 정씨(程氏)이요, 넘실대는 압록강(鴨綠江)은 실로 선생에게는 하나의 부강(涪江)이었던 셈이다. 이적(夷狄)의 환난(患難)이 진실로 철인(哲人)의 횡액(橫厄)과 같거니와, 현재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 형통한 도가 있어서 도리어 그 사공(事功)의 아름다움을 조발(助發)할 수 있게 되었다. 미언(微言)과 지훈(至訓)이 아래로 백세토록 전해져서 전현(前賢)과 후현(後賢)이 마치 부절(符節)을 합한 듯하니, 천의(天意)를 알 수는 없으나, 혹여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이천(伊川)은 살아서 돌아왔으나, 선생은 객지(客地)에서 돌아가셨다. 고인이 이르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의 도에 있어서 누가 될 수 있겠는가? 서원(書院)이 마침내 서만(西蠻)에서 세워지고 새로운 사당이 동삭(東朔)에서 세워지니, 함께 옳다고 여기는 마음은 시대에 고금(古今)이 없고 지역에 피차(彼此)가 없는 것이다. 과연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선생의 손자 준(浚)이 동경(東京  경주(慶州)를 달리 이르는 말)에서 왔다가, 마침 김생(金生)을 도하(都下)에서 만나 이 사당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김생이 이르기를, “군(郡)의 사당에는 이미 기문(記文)이 있는데, 부의 사당은 유독 그렇지 못하다. 어찌 도모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고찰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준 역시 내가 선생에게 있어서 인척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내 집 문에 이르러 그 일을 고해주고 이어서 기문을 위촉하였다. 나는 불각 중에 경탄하며 일어나 김생을 맞이하여 상세한 것을 물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을 아는 자가 아니니, 어찌 감히 한 마디 말을 돕겠는가? 다만 이른바 천의(天意)는 헤아릴 수 없고 인심(人心)은 속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삼가 일찍이 느끼는 바가 있었기에, 문장이 졸렬함을 혐의하지 않고 그 설(說)을 적어 본다.

김생은 당시에 강학(江學  강계부의 향교(鄕校))을 맡고 있었는데, 모양은 순박하나 바탕은 중후하여 말을 내는 것이 진지하였다. 이 사람은 곧 서새(西塞  서쪽 변방)의 수재로서, 선생께서 살아계실 적에 1년 동안 장구(杖屨)를 배종하였다고 한다. 두 사당을 앞장서서 세운 것은 공적이 매우 가상하거니와, 이미 군기(郡記)에서 서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

경주양동 회재선생 사당기임니다 소고션조 형제분이 경자년식년시 동방 급제로 당시영남 감사로 영주를 방문 국조이래
영남에 경사라고 격려하시고 해가저도 떠랄줄 몰랍답니다 손자 준이 찿아와 사당기를 부탁 손자 준은 옥산쪽 사람으로

현 코롱구럽 선조로 사료됩 인척 관계를 말했다니 알수없음   인천서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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