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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역사 왜곡: 십만양병설?!
조회 : 3278 (2014-10-04 17:06:27) 이름 : 박승허

<퍼 온 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십만양병설이란 게 있다. 좀 심하게 이야기 하면, 이땅에 사는 초등학생만 해도 다 아는 역사적 진실처럼 되어있다. 그런데 이게 진실은 커녕 이땅을 300여년 좌지우지 했던 노론들이 지어낸 순 날조된 허구라는 걸 나는 지금부터 써 내려 가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로 부터라도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내주장이 틀렸다는 논증이다. 나는 어떤 반론이라도 옷깃 여미고 겸허히 들을 귀를  준비하고 있다.

 

먼저, <십만양병설>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만든 날조다. 십만양병에 대한 주장이나 글은 <율곡전서>, <선조실록>, <서애집> 어디에도 없다. 만약 율곡이 진짜 십만양병을 주장했다면 수많은 차자(箚子), 상소(上疏) 등이 모두 빠짐없이 실려있는 <율곡전서>에 이게 누락될 리가 없다.


십만양병이 처음 언급된 기록은  김장생이 율곡 사후 13년 뒤인 1597년에 쓴 율곡행장(栗谷行狀)이다. 행장이란 죽은사람의 세계(世系), 언행, 저술 등을 친구나 제자, 아들 등이 쓰는 것이다. 자연 미화(美化)가 따르기 마련이므로 역사적 사료(史料)로 쓸 때에는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다음은 김장생의 지은 율곡행장의 일부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율곡이 청하기를 “십만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사태에 대비해야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장차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화(禍)가 있을것입니다.”라고 하자 정승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사변이 없는데도 군병을 기르는 것은 화근을 기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어 모두가 편안에 젖어 있었으므로 경연에서 신하들이 율곡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여겼다.

   선생이 밖에 나와 성룡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속유(俗儒)들은 시무에 통달치 못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 또한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임란(壬亂)을 맞은 후에 류정승이 조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문성(李文成)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만약 그의 말을 채용했더라면 국사가 어찌 이지경에 이르렀겠는가?”라고 하였다.>

 

 

위의 행장이 바로 <율곡십만양병설>의 출발점이다. 이 글 이전에는 어디에도 율곡의 십만양병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이 엉터리 글을 쓴 김장생의 기호학파 내의 위치는 어디인가? 기호학파는 이이-송익필-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로 내려 간다.

 

이 행장 이후에 나타나는 십만양병에 대한 언급은 전부 위의 행장의 모순을 고쳐 가며 줄여 쓴 것이거나, 시간의 차이 때문에 그 당시 기준으로 재가공된 글들이다. 1612년에 나온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율곡시장(栗谷諡狀), 쓴 시기가 불명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율곡신도비명(栗谷神道碑銘), 율곡 사후 60년 뒤에 쓴 송시열(宋時烈)의 율곡연보(栗谷年譜) 등이 그렇다.

 

그럼 위 행장의 모순을 열거 해 보자.

 

율곡 살아 생전에 류성룡은 정승이 아니다. 류성룡이 정승이 된 것은 1590년 음 5월29일인데, 율곡은 이미 1584년에 죽었다. 위의 글에서 류성룡이 율곡을 이문성(李文成)이라고 시호(諡號)를 부르고 있는데, 율곡 이이(李珥)의 시호는 류성룡이 죽고 나서 15년 뒤에 내려졌다. 류성룡이 살아 생전 율곡의 시호를 알 리가 없다. 류성룡이 죽은 해는 1607년이고 율곡이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해는 1622년 이다.


율곡행장과 율곡시장에는 <이문성진성인야(李文成眞聖人也)>라고 했는데, 이항복의 신도비명에는 <이문정진성인야(李文靖眞聖人也)>로 고쳐 썼지만 이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선견지명을 말할 때 송나라의 명재상인 이항(李沆)의 고사를 들어 <李文靖眞聖人也>란 관용구를 썼으니까.


그러나 송시열의 율곡연보에 오면 가관이 된다. 율곡이 십년 전에 예언했다는 시간을 꿰맞추기 위해 위의 세 기록, 행장ㆍ시장ㆍ신도비명에 나타나지 않은 1583년 4월이란 시간이 설정된다. 이는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란 조작의 대가가 쓴 임진기사(壬辰記事)를 원용했다. 노무현에게 김대업이 있다면 송시열에게는 안방준이 있다. 조작을 해주고 서인들의 추앙을 받고 산 인물이 안방준인데, 40여년 뒤 류후장(柳後章: 1650-1706)이 상소를 올려 날조를 증명하고 사당까지 뜯어 버렸다. 이러한 확대 재생산 작업을 거쳐 선조실록에 없던 십만양병설이 선조수정실록에 버젓이 등장을 한다.

 

선조실록은 북인 집권시인 광해군 때 기자헌(奇自獻), 이이첨(李爾瞻)이 주도해 만들었다. 이 북인들은 누구보다도 류성룡을 미워했다. 북인들은 정여립역모사건 때 류성룡이 화끈하게 서인들과 싸우지 않았다고 싫어 했다. 만약 율곡의 선견지명을 류성룡이 반대해 임진왜란 같은 민족의 수난을 옳게 대비 못했다면 북인들의 입장으로는 이를 선조실록에서 뺄 리가 없다. 그러나 선조실록에는 십만양병설은 한줄도 없다.

 

선조수정실록에 드디어 십만양병론이 등장한다. 선조수정실록은 북인들이 기록한 선조실록을 영 못마땅하게 생각한 서인들이 만든 것이다. 1643년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주도로 시작해서 지지부진 하다가 14년 뒤인 1657년 9월에 완성했다. 이미 김장생의 날조로부터 송시열까지 60년의 세월동안 왜곡이 축적되어 있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십만양병은 말은 좋으나 당시의 나라 형편을 전연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 이며 양병의 해(害)가 양병의 효과보다 더 큰 발상”이라고  썼다. 김만중은 십만양병설을 조작한 김장생의 증손자다.

 

율곡의 십만양병론은 해방 뒤 우리나라 최초의 국사교과서인 서울대학교 국사연구회 편찬 <국사개설(國史槪說: 1946 덕흥서림)>, 한국사를 가장 객관적 입장에서 썼다고 평가되는 이기백의 <국사신론(國史新論: 1967, 1999 일조각)>, 한우근의 <한국통사(韓國通史: 1970, 1996 을유문화사)> 등에는 없다.

 

이병도 만이 그의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 1964 보문각)>에서 이이(李珥)의 구폐책(救弊策)이라고 해서 십만양병설을 크게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홍직編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1977 대영출판사)> 1197-1198쪽에 보면 “율곡은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했는데, 특히 그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새빨간 조작이다. 율곡의 만언봉사에는 시정책 7개항이 있지만, 여기서는 군정의 폐단만 지적했지 "십만양병"이란 말은 한마디도 없다.

 

송복(宋復) 교수도 <위대한 만남>이란 책에서 사회경제사 측면에서 십만양병설이 얼마나 황당무계한가를 조목 조목 따지고 있다. 라이샤워 등 3인이 쓴 <동아시아, 현대적 전환>이란 책에서 1590년 조선인구를 5백만으로 추정했고 효종 8년 1657년 실시된 호구조사 통계는 조선인구가 2,290,083명 으로 나와 있는데 율곡이 십만양병을 주장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큰 학자고 정치가라는걸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율곡이란 존경 할만한 학자의 상소문이나 16년간 그가 써 놓은 경연일기, 서간문 어디에도 <십만>소리는 없다. 그의 후학 김장생의 조작일 뿐이고 대표적 친일사학자들의 온상인 조선사편수회를 대표하는 이병도의 왜곡일 뿐이다.


June 27, 2008

김 창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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