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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落南)이라는 말은 판관공의 아들 좌부승지공 박숙 선조께서 대대로 서울에 사시다가 15세 때(1458년) 경북 안동(安東)으로 내려온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좌부승지공께서 안동으로 내려오신 역사는 우리 판관공파의 뚜렷한 파맥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그 후 사림의 학풍이 번성하는 경북 북부지역(안동, 영주)에서 판관공파는 명문가로서 존경을 받으며 학자와 선비를 배출하는 뚜렷한 역할을 해 갑니다.  ‘낙남(落南)'은 서울기준으로 남쪽으로 내려감을 의미하는 통칭어입니다.
낙남실기(落南實記)에 그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조(先祖) 호장공(戶長公)께서 호남 나주(湖南 羅州)의 반남현(潘南懸)에 기지(基地)를 잡으시니 우리는 반남 박씨(潘南 朴氏)인 것이다.  5세조(五世祖) 문정공(文正公) 휘(諱) 상충(尙衷)께서 고려조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반남선생이시다.
 6세조(六世祖) 평도공(平度公) 휘(諱) 은(訔)께서 이조(李朝) 태종조(太宗朝)에 좌의정(左議政)이시었고 7세조(七世祖) 참판공(參判公) 휘(諱) 규(葵)는 4남 5녀를 두시니 우리 분파(分派) 선조 판관공(判官公) 휘(諱) 병균(秉鈞)은 둘째 아들이다.
 판관공께서 일찍이 음사(蔭仕)로 환로(宦路)에 나가셨으나 홍주판관(洪州判官) 재임중(在任中)에 불행(不幸)하게도 시질(時疾)로 조년(早年)에 내외분(內外分)이 일시(一時)에 졸(卒)하시고 낙남(落南) 선조(先祖) 증 좌부승지(贈 左副承旨) 휘(諱) 숙()께서 독자(獨子)로 4남매가 유년(幼年)에 고애(孤哀)가 되어 암담(暗澹)한 처지(處地)가 되었다.

 당시는 단종 손위(端宗 遜位)와 세조 등극(世祖 登極)으로 풍운정국(風雲政局)이 파란중첩(波瀾重疊)하던 때이어서 판관공(判官公) 하세전후(下世前後)의 사실과 증 좌부승지공께서 성장(成長)과 낙남하신 사실(史實)이 기록으로 전승(傳承)된 것이 없어서 후손은 수백 년 동안 한스러움을 개탄(慨嘆)하여 왔다.

 낙향하신지가 500여년이 넘었으며 우리는 좌부승지공 혈손으로서 4,000호에 15,000여명의 자손이 신빙할 수 있는 사실을 구명(究明)하고저 결의(決議)하였으니 가능한데까지 탐사(探査)하였다.
(撰)〕에 현국명가(顯國名家)로서 조년(早年)에 관직(官職)을 지냈으니 음사(蔭仕)로서 봉직랑(奉直郞) 사온서령(司暑令)으로 보임(輔任)되어 홍주판관이 되셨다가 내외분이 일시에 요서(夭逝)하시니 처가택(妻家宅) 흥양 유씨(興陽 柳氏) 집에서 장사(葬事)하였고 고유(孤幼) 4남매(四男妹)가 무의무탁(無依無託)하여 서울 외백숙(外伯叔)이 분육(分育)하여 가취(嫁娶)시켰으며 판관공의 생졸(生卒)과 제배 년대(除拜 年代)는 알 수 없다. 기록으로 보존된것은 판관공 묘갈〔소고(嘯皐)승임(承任)찬
 증 좌부승지공 묘갈〔육우당(六友堂) 회무(檜茂) 찬(撰)〕에 공(公)은 세종 26(1444)년에 출생하여 조년에 부모를 여의고 안동부 능성 구씨(綾城 具氏)가에 장가드시니 사용(司勇) 익명(益命)의 딸이다.
 한양(漢陽)에서 안동부 와룡면 가구리(佳邱里)에 이사하여 중종 21(1526)년에 졸하니 향년 83세로서 덕동 곤좌원에 장사(葬事) 지냈다.
 공(公)은 음사(蔭仕)로서 충의위(忠義衛)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좌위(忠佐衛) 부사직(副司直)이었는데 손자인 승임(承任)의 귀현(貴顯)으로 인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상 묘갈(墓碣)이외에는 기록이 전혀 없어서 구전(口傳)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양양군(襄陽君) 임자번(林自蕃)이 안동 부사로 재임(在任)한 사실을 구명하고저 안동부(安東府) 임사록(任司綠)을 조사하였으나 안동(安東) 부사(府使)로 재임한 사실이 없고 뜻 밖에도 세조 4년(1458. 6. 28)에 좌부승지공 15세시 공(公)의 존 고모부 평도공 은(訔)의 사위 양성(陽城) 이중(李重)씨가 안동 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양군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알기 위하여 이조 왕조 실록(李朝 王朝 實錄)을 열람하여보니 정난공신(靖難功臣) 대호군(大護軍)이었다가 세조 2(1456)년에 낙백(落魄)되어서 익년(翌年)인 세조 3(1457)년에 봉직랑(奉職郞)으로 재등용 되었음을 발견하니 구전야설(口傳野說)은 사실과 판이(判異)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로서 고모부(姑母夫) 양양군(襄陽君)이 아니고 존 고모부(尊 姑母夫) 이중(李重)씨가 안동 대도호부사로 부임 하실 때 따라서 안동으로 낙향하신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조실록을 열람하는 과정에서 판관공께서 단종 2(1454)년에 봉직랑(奉職郞)으로 제수되었음이 기록에 있었다.
 아! 현세의 문화가 지극히 발달되어 왕조실록과 안동부 임사록을 쉽게 열람 할 수 있었다. 는 것이 매우 다행한 일이며 이제야 늦게나마 낙향하신 년도와 경위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영명(英明)하신 선조의 음우(陰佑)하심인가하여 감읍(感泣)할 따름이다.
 끝으로 이상과 같은 탐구(探究)조사에서도 판관공 생졸년대(生卒年代)는 여전히 알 길이 없어 통탄(痛歎)스러운 일이니 앞날에 후진들은 더욱 깊이 상고(詳考)할 것을 바랄뿐이다.

 

........생략......... 김담(金淡)을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이중(李重)을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로, 이하 생략........

【원전】 7 집 27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고양 덕동 실기 간행 위원회(高陽 德洞 實記 刊行 委員會).〈 위원장 용준(龍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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